⑶동학

,kang jungsan (강증산)

춘추당 2017. 3. 1. 12:16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에서 옮겨온글 입니다
제목  신이된 조선 머슴
"텔레비전 챈널을 돌리다 보면 가끔 독특한 종교방송을 만난다. 조선말 존재했던 강증산이란 인물을 신봉하는 것 같다. 강증산이란 뿌리에서 태극도나 증산도 대순진리등 여러 종교가 가지를 펼쳐나갔다. 종교단체 내부의 소송을 맡게 되면서 강증산에 대해 알아보았다. 구한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열네살에 머슴이었다. 머슴 일 다음에는 정읍의 입암면 산속에서 나무를 찍는 산판노동을 했다. 그는 종교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신약전서도 읽고 교회에 가보기도 한다. 사서삼경을 읽고 민족고유의 도참이나 주역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순례의 길을 떠난다. 밭가는 농부를 만나면 밭을 갈아주고 밥을 얻어먹고 장이서면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해 주기도 했다. 산속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면서 구도의 길을 갔다. 어느 날 먹지 못해 냇가에서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 옆에 있는 어린 딸이 시냇물에서 물 새우를 잡아 아버지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버지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그 새우를 입에서 다시 꺼내 어린 딸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그의 가슴에 물결이 일었다. 강증산은 망해가는 조선 속에서 민중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모악산 제비봉에 바위에서 명상수도를 한다.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오던 날 어느 날 그는 신의 메시지를 받는다. 활동을 시작한 그의 행적이 흥미롭다. 당시 불길같이 번지던 동학혁명에 대해 그는 정면으로 반대한다. 겉으로는 혁명을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각자 양반이 되어보고 부자가 되고 싶은 탐욕과 증오를 품은 혁명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며 말렸다. 그는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지만 결국 불의 심판을 받고 일본 땅으로 물러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2차 대전의 종말을 안 것이다. 그는 중국이 그 후 조선을 침공하지만 남쪽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6.25전쟁을 본 것 같았다. 

그는 세월이 흐르면 남조선의 배가 세계의 바다를 가득 채우며 떠 있는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그는 사람들의 앞날을 보는 영적 능력도 있었던 것 같다. 주막 구석에서 허름한 평복으로 위장한 순검을 보고 그날 밤 죽을 운이라고 알려주다가 따귀를 얻어맞기도 했다. 인간과 귀신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는 흥미롭다. 인간의 마음은 귀신이 묵거나 지나가는 통로라고 했다. 귀신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인간은 속에 들어있는 귀신에 의해 조종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귀신에 의해 조종되는 껍데기라는 것이다. 구한말 의지할 곳 없는 민중은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태을주라는 주문을 만들어 민중에게 염송하게 했다. 만트라 같은 주문을 계속하면 마음속에 공명이 생기면서 정화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학혁명이나 애국계몽운동보다 대중의 마음을 바꾸어야 개벽이 되고 상생의 시대가 도래 한다고 했다. 그는 대중을 현혹하고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는 혐의로 고창경찰서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한일합병이 되기 한해 전인 1909년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일제시대 그를 신봉하는 종교가 들판에 번지는 불길 같이 일어났다. 어느 민족에게나 신의 뜻이 전해지는 예언자 같은 인물이 있는 것 같다. 모악산 제비봉 아래의 성전 속에서 그는 신이 되어 있었다."


천지공사의 시작[원본 편집]

1901년(道紀 31년, 辛丑年)에는 대원사에 들어가서 49일간 불음불식의 공부 끝에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 나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 나를 믿고 힘을 다하라."고 천지공사를 맡아보신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김형렬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천지공사를 시작한다. 천지공사(天地公事)란 천지인 삼계(三界)를 다뜯어 고친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세상이 상극(相剋)으로 인해 원과 한이 쌓이고 그 것이 또 인과(因果)로 인해 돌아오므로 삼계가 진멸지경에 빠졌기에 신의 세계, 신명계, 인간계를 상생(相生)의 도수로 바로 잡는다는 뜻이며 그러한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이므로 세상은 이러하니 이렇게 살아라라고 하신 성인(聖人)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다. 이후 김형렬의 안동 김씨 친족중 김자현, 김경학, 김갑칠이 따르게 된후 9년동안의 천지공사를 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기행이적들이 있었으며, 천지공사의 내용에는 우리나라의 국운(國運)에서 부터 음양공사, 매화(埋火)공사, 해원(解寃)공사, 신명공사 등등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갈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 있는데 일제의 통치나 6.25전쟁, 남녀, 적서, 신분의 차별이 사라짐, 88서울올림픽 등등 기타 포괄적인 내용이 대다수 현실화 되었다.

천지공사 배경[원본 편집]

천지공사의 배경에 대해 강증산은 직접 다수에 걸쳐 밝힌 바 있다. 그를 따른 김형렬에게 "서양인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고 직접 이야기 하였다. 쉬운 말로 지금까지의 세상이 경쟁, 시기, 질투, 투쟁 등 상극의 속성에 지배되어서 원과 한이 세상에 쌓이다보니 신과 인간이 서로 통하지 못하여 세상에 전쟁, 기근, 괴질을 비롯하여 살인, 사고, 강도, 질병 등 끊임없는 재난과 화난이 그치질않아 그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고 선천의 종교와 법이 있었지만은 세상을 구하지 못하고 도리어 생명을 죽이고 일부의 이익만을 대변하다보니 세상을 살펴주고 있는 천지신명의 입장에서 어찌할 수 없이 간청을 하여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직접 내려왔다고 이야기하였다. 또 판 안에 있는 법을 써서 일하면 세상 사람의 이목의 저해가 있을 것이라 판 밖에서 일한다고 하여서 선천의 유도나 불도 선도의 법이 아닌 해원상생의 법으로 일을 한다고 하였다.

실현된 천지공사[원본 편집]

실현될 천지공사[원본 편집]

강증산의 제자들[원본 편집]

강증산이 천지공사를 봄으로부터 김형렬의 집, 김제 구릿골에 주요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강증산의 조화권능을 체험했다고 전한다. 강증산의 주요 제자로는 수석제자인 미륵불교 김형렬을 위시하여, 일제시대 최대의 교단으로 조선총독부 기록 650만의 신도를 거느린 차경석의 보천교와 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이치복, 백복남, 김호연, 신경원, 신경수, 이도삼, 안필성, 백남신, 신원일, 김광찬 등이 있다.

사망[원본 편집]

1909년 음력 6월 24일(양력 8월 9일) 사망했다.

교단[원본 편집]

강증산의 교단[원본 편집]

사후 강증산을 직접 수종들었던 제자들이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고부파, 도리원파, 김병선교단으로 9개 교파로 갈라졌다. 보천교에서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 조달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의 민족종교 탄압정책으로 인해 강증산의 교단과 제자들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5년 고수부가 선화한 후 1936년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이어서 사망하였다. 차경석교주가 사망하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보천교를 탄압하여 십일전 건물을 해체하여 일부는 지금의 조계사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일부는 전주역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 그후 남은 잔해는 방치되었다. 보천교 십일전 건물의 터를 비롯한 강증산의 교단 유적들은 전라북도 정읍의 향토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강증산과 고수부의 교단[원본 편집]

강증산은 고수부에게 종통대권을 넘겨주는 공사를 보았다고 한다. 고수부는 1911년 강증산의 성령을 받은 이후 도통을 하였다고 한다. 강증산의 어천이후 흩어졌던 강증산의 제자들이 고수부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 최초의 교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후 고수부와 강증산을 직접 모셨던 제자들이 만든 교단은 1920년대까지 급격히 성장하였고 이후 이 교단에서 차경석과 다른 일본의 탄압으로 인해 명맥이 끊어지고 제자들이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45년 일본 패망이후 강증산을 옥황상제이자 미륵불로 믿는 신도들 일부가 모여 다시 교단이 보천교 부흥운동이 형성되었으나 약 1만명이 모이는 것으로 그쳤고 다시 교단이 형성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1945년 안운산 태상종도사는 강제해산된 보천교에서 60방주중 중심 인물을 역임한 몇명과 같이 강증산과 고수부를 믿는 대법사 증산교를 설립하였다. 대법사 증산교에서는 강증산을 미륵불이자 옥황상제로 고수부를 강증산과 같이 이 땅에 도솔천에서 강세한 성인이자 최초의 여성 부처님으로 믿고 있다. 강증산의 친족들중 진주 강씨 문중의 상당수의 사람들도 교단이 형성되자 강증산과 동일한 기행이적을 행하는 고수부의 교단에 모였다고 한다.

강증산의 친인척이 세운 교단[원본 편집]

강증산의 친인척중 정씨부인, 여동생인 선돌부인, 딸인 강이순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이다. 강증산은 당시 1907년 동아일보 신문에도 게제된 바 있어 당시 조선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강증산의 성령을 받은 고수부와 제자들이 교단을 형성되자, 이에 자극받아 강증산의 직전 제자는 아니었으나, 강증산의 가르침을 받드는 교단이 형성되었다. 정통성으로는 강증산의 첫째부인인 정씨부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 여동생인 선돌부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 딸인 강이순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들이다. 대표적으로 불법연구회, 순천교, 무극도, 태극도, 삼덕교, 보화교, 용화사, 미륵불교, 증산법종교, 청도대향원, 미륵종, 증산진법회가 있다. 현재 가장 큰 교단은 무극도에서 나온 대순진리회가 대표적 교단이다.

강증산에 대한 경전[원본 편집]

초기경전[원본 편집]

일본 강점기시기에 발간된 경전들이다. 식민지 지배하에 민족종교 탄압정책으로 언론과 종교활동에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경전간행이 비교적 자유롭지가 못했다고 한다. 성격상 한민족이 인류를 구원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동시에 민족종교는 만주 무장 독립투쟁의 군자금의 조달처이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일제 강점기 민족종교 탄압과 집회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이런 배경속에서 발간된 최초의 경전이 증산천사공사이 이다. 1922년 수석성도인 김형렬의 증언을 받아서 미륵불교에서는 최초의 경전을 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륵불교의 경전으로 간행되기 전에 김형렬의 증언을 받아 자료를 수집한 이상호가 미륵불교를 탈교하였다고 한다. 그후 이상호는 증산천사공사기를 개인의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상호는 이후 대순전경을 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동화교를 창립한 후 보천교 차경석교주에게 있던 고수부를 동화교로 모셔오게 된다.

1945년 일제강점기 이후 간행된 서적들이다. 경전간행이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어느정도 해결되었으나 정작 교단이 해체된 상태여서 강증산의 직전제자들이 만든 교단들을 중심으로 강증산의 행적이 전수 되었다고 한다. 각 교단이 서로 경쟁관계 였기 때문에 이러한 중요한 내용들이 타 교단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고 한다.

초기경전의 한계[원본 편집]

통합경전[원본 편집]

강증산의 제자들이 거의 대부분 사망한 이후인 1970년대에 증언과 기록을 수집하고 대조하기 시작한 경전이다. 1970년대 이전에 간행된 초기경전들은 같은 구절에 대해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거나, 시기와 참여자에 대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특정인 한명의 시각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빠진 내용이 많고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불가능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증언자끼리 수차례에 걸친 교차검증과 현장 답사를 거친 경전간행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합경전은 강증산의 제자들 중 강증산을 가장 오랫동안 따라다녔던 김호연의 증언이 수집되어 추가되었다. 초기경전 전체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은 내용이라고 한다. 수석제자인 김형렬의 증언에만 의존하던 내용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수부에 대한 경전은 고수부의 직전제자인 고찬홍과 고민환등에 의해 자필로 제작되어 영인된 일부 경전이 있었으나 역시 답사를 거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증산도의 안경전종도사가 통합경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30년 동안 현장답사와 확인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강증산을 직접 따르던 제자중 마지막 제자에 속하는 김호연을 만나 9년동안의 전반적인 천지공사과정을 증언을 받아 현재의 증산도 도전 개정판에 추가하였다고 한다.

각 교단에서 초기경전을 사용하는 곳은 있으나 통합적인 답사와 확인작업을 거친 경전은 최초로 발간된 경전이 증산도 도전이다.

참고 자료[원본 편집]

  •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증산도 도전》, 2003년.
  • 전경
  • 선도진경
  • 이상호, 《대순전경》, 1997년.
  • 보천교 연혁사

같이 보기[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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