⑶동학

현무경의 유래와 장기준

춘추당 2015. 8. 30. 11:42

증산의 현무경이 세상에 나오게 된 사연을 들어보면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재밌다.


일제시대에 전남 순천에서 면장 일을 보던 이가 있었다.

그는 1880년 경진년생 장(長) 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사람은 태을주를 통해 현무경을 만나게 되고 서전서문을 읽고 현무경의 비밀을 풀어낸 사람이다.


면장 노릇할 때 일제의 간섭에 불만을 품고 사직한 뒤 일왕을 시해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한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날 밤...


홀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가면서 동지들에게 닭이 울기 전에 돌아오지 않으면 해산하라고 했는데

일이 잘못되어 다른 날보다 닭이 일찍 울어버렸다.


본의아니게 동지들을 배신하게 된 장 선생은 자책하고 울분하다가

33세에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 만다.


선산에 움막을 짓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데 누가 찾아와 태을주를 권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태을주를 읽었더니 불치병인 문둥병이 깨끗히 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신묘한 치병력을 가진 태을주의 내력을 물으니 전주 김형렬을 소개한다.

그러나 김형렬은 다시 정읍 대흥리 고수부를 추천한다.


정읍에 갔더니 고 수부의 거소에 훗날 보천교를 창시하여 차천자로 불리운 차경석과 함께 있었다.

묘하게도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동갑이다. 경진생. 후세 사람들이 이들 3인을 삼룡이라 불렀다.


장 선생은 고 수부의 살림이 어려운 것을 알고 생활비를 건넨다.

이 때 고 수부는 장 선생에게 증산이 남긴 법궤 열쇠를 주면서 한번 열어보라고 한다.


이 법궤에 대해서는 전설이 전한다.


1909년 증산은 현무경이라는 책을 써서 둔궤(또는 법궤)에 넣어두고 자물쇠를 채운 다음 

고수부에게 열쇠를 맡기면서 "후일 임자가 아닌 자가 법궤를 열려고 하면 벼락을 맞으리라." 했다고 한다.

또 제자에게 "내가 책 한 권을 정읍에 두리니 그 책이 나오는 날에는 세상사를 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했다.


차경석이라는 제자는 야심이 커서 이종 누님인 고 수부에게 열쇠를 달라하여 이 둔궤를 몇 번이고 열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늘에서 우르릉 하는 뇌성이 들려 겁나서 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하던 이야기도 돌아와, 장 선생은 고 수부가 건네주는 열쇠로 법궤를 열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차경석이 불같이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간다.

그깟 돈 좀 준다고 아무한테나 열쇠를 주냐는 거였다.


그런데 차 씨가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방안에서 환성이 들리는 것이다.

다시 들어가 보니 법궤가 열렸는데 그 안에 3개의 심지가 있고 그 각각에


'포정도수 차경석'

'율려도수 안내성'

'대학도수 장기준'이라고 씌여 있는 것이었다.


이에 차경석은 장 선생을 달리 보면서 "같이 큰 일을 도모하자" 하였으나 장 선생은 응하지 않고

궤 안에 들어 있던 현무경만을 베껴 써가지고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1915년 3월 전주 동곡에서 김형렬이 도통했다는 소문이 날아들어 기대감을 갖고 달려갔으나 형렬의 화둔공사가 열리지 않자 2년 만에 실망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뒷산의 제왕봉에서 증산이 말한 서전서문을 1만독 하는 수련을 행하게 된다.


석달 만에 활연대통을 한 장기준 선생은 그로부터 혜안이 열려 현무경을 풀게 되었다.

그 뒤 현무경 대학법방을 개설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춘래(春來) 유 선생에게 법통을 넘기고

1922년 죽는다. 춘래장 밑에서 많은 도생들이 배출되어 지금의 현무경파를 이룬다.


장기준이 수행한 서전서문은 채침이라는 사람이 서문을 썼는데 채침의 스승인 주희의 명을 따른 것이다.


남송 시대의 유학자인 채침(蔡沈)의 호는 구봉(九峰)이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스승 주희 밑에서 공부하다가 나중에 부친을 따라 구봉산에 들어간다.

채침은 소옹의 황극경세서에 수(數)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구봉산에서 약 10수년 동안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 사람들에게서 학자로서 구봉선생으로 불렸다.


1230년에 죽자 나라에서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시호와 똑같은 시호를 받은 사람이 조선국에 한사람 또 있는데 문정공 허목이다.


이 대목에서 내 필명을 문득 채룡(蔡龍)이라고 바꿀 생각을 했었는데

蔡는 거북이 채 자이면서 점치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채룡은 말하자면 용거북이라는 얘기다.

채침이라는 사람도 벼슬길을 나아가지 않았다는데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아버지 부임지를 따라 다녔던 허목과 똑같은 무엇을 느꼈기 때문이다.

허목 역시 거북이를 생각케 하는 면모가 강한 사람이었다. 


증산의 현무경도 따지고 보면 거북경, 용거북경이라고 해도 될 성싶다.


채침의 서전 서문은 선천 요순우 임금 심법과 후천 정역이 나올 것을 예고한 글이다.


"가정(嘉靖) 기사3월 기망에 무이 채침이 서전서문을 쓰다."


'가정'과 '무이(武夷)', 그리고 증산이 이마두를 장사지낸 광주 무등산 (구천)상제봉조혈 등은 연관이 있다.

증산이 유가의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흠이 없다며 칭찬한 인물의 채침의 스승 주희다.

그의 제자가 채침이었고 그가 지은 서전서문을 증산은 많이 읽으라고 당부했다.


주자가 무이정사에 은거하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노래한 九曲을 가리켜 사람들은 무이구곡이라 한다.


9라는 수가 자주 등장한다. 9봉, 9곡, 9天...



* 신명부의 무이구곡


지금까지의 얘기 가운데 눈여겨 볼 것은 태을주가 문둥병을 낫게 하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화권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 태을주를 누군가가 깨워내야 한다. 그럴 때가 된 것같다.

사오미 개명이 이루어지는 해에 준비되어 있어야한다.


그리고 문둥병을 앓던 사람이 태을주를 읽어 고수부를 만남으로써 증산의 현무경을 얻었으며

증산은 이미 자신의 사후에 장기준이라는 사람이 정읍에 찾아와 자신의 둔궤를 열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 선생은 채침의 서전서문을 10000번 읽는 수행끝에 현무경을 해독하였고

현무경은 증산 사상의 골수를 담은 책이며 개벽장 증산의 시루로 쪄낸 떡(후천 식량)을 상징한다.


증산의 출현을 알린 수운도 거북 龜 자를 남겼고, 증산도 현무경이라는 거북책을 남겼다.

무이구곡의 채침 역시 거북의 후손이었으며 현무경을 깨친 사건이 거북 채침의 서전서문 때문이 아니던가.


이걸 보면 현무거북은 부처님의 사리와 같이 응결된 진리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 필명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이러저러한 연유에서 채룡이나 구봉이라 바꿔야겠다.

거북의 뜻이 들어 있으면서 물과 불 음양의 짝을 맞춘 구봉으로 쓰려고 한다.

채침 구봉九峰에서 문정 구봉龜鳳으로.


龜鳳. 구봉


화수미제 5효.


대한민국 乙未 2월 15일

문정원에서 구봉 쓰다.


* 한반도의 운명과 축부(丑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