⑵예언서

사산비명

춘추당 2018. 11. 2. 11:34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명 1편(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열린학당
권진순 | 조회 52 |추천 0 | 2012.02.10. 17:51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敎諡眞鑒禪師碑銘 幷序
1. 孤雲 崔致遠의 生涯
최치원은 신라 憲安王 1년(857)에 경주 沙梁部에서 부친 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라 육두품 출신으로 家門은 넉넉했으며 12세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때(847) 
賓貢科에 급제하였다. 
20세때 지금의 江蘇省의 凓水(율수) 현위가 되었다.
21세때 博學宏詞科에 응시하고자 사직하고 공부하다가 黃巢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高騈 淮南節度使의 從事官이 되었다. 
그때 지은 “檄黃巢書“는 명문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높다.(討黃巢檄文)
28세때(884) 당희종의 使臣形式으로 신라로 귀국하자 憲康王은 侍讀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직을 주었다. 
그러나 주위로부터 시기가 많고 신라 말기의 혼란으로 본인 자신이 외직을 자청하여 
大山(泰仁), 富城(瑞山), 天嶺(咸陽) 등의  태수가 되었다.
진성여왕 8년(894)에 時務十餘條를 올리고 阿湌에 임명되었으나 
孝恭王 2년(898) 41세때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치게 된다.
경주의 金鰲山, 지리산 쌍계사 등지에 머물다가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하며, 
훗날 고려 顯宗때 內史令을 추증하고 文昌侯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결코 신라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저술로는 唐書, 藝文志에 의하면 
“四六集” 1권, “桂苑筆耕集” 20권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문집30권이 세상에 전해진다”고 하였다. 
계원필경집과 사산비명만이 지금까지 남아있어 한문학사상 最古의 문집과 
金石文의 新紀元을 엮게 되었다. 
2.四山碑銘이란?
1) 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幷序) : 충남 보령
2) 智異山雙谿寺眞鑒禪師碑銘(幷序) :경남 하동
3) 初月山大崇福寺碑銘(幷序) :경북 경주
4) 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幷序) :경북 문경
이중 초월산대숭복사비는 인멸되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3개비중 진감선사비는 
조선 영조 1년(1725) 목판에 移刻한 비문에 의하면 “光啓 3年 7月 日建“ 이라는 것으로 보아 
신라 定康王 2년(887)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비명 병서에 대하여
국보 47호인 이 비는 경남 河東郡 花開面 雲水里 쌍계사 경내에 있으며 6∙25때 비신에 
손상을 입어 균열이 심한 편으로 일부는 缺落되기도 하여 지금은 철판으로 보완되어 있다.
약 2,500자가 남아 있고 정강왕2년(887)에 세워졌고 글씨도 최치원이 썼으며 당나라 歐陽詢의 
骨에 顔眞卿의 肉을 붙여 쓴 것으로 神筆에 가까우며 奐榮스님이 새겼다. 비문을 세단락으로 
나누어 儒.佛.道 三敎思想이 그 근본을 파고 들면 서로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선사의 生涯와 
景行을 간명하게 서술했고 끝으로는 비문을 짓게 된 경위와 자신의 심경을 적었다.
특히 “道不遠人 人無異國”은 유∙불∙도의 삼교사상에 대한 결론을 지칭한다.
진감선사의 법호는 慧昭이고 속성은 최씨이며 익산 金馬사람이다.
신라 36대 惠恭王 10년(774)에 태어나 46대 文聖王 12년(850)에 77세로 入寂했다.
哀莊王 5년(804) 입당하여 道義<九山禪門을 창시한 스님- 迦智山門-장흥 보림사> 스님과 
道友하여 공부하고 興德王 5년(830)에 귀국, 지리산 화개곡 玉泉寺에 머물면서 閔哀王의 부름도 
거절하며 수도에만 전념하다가 입적하였다. 
憲康王때 “眞鑒”이라는 시호와 “大空靈“이라는 塔號를 내렸으며 定康王은 옥천사의 이름을 
“雙谿”로 개칭했다.
비문에는 쌍계사의 由來및 佛敎音樂인 梵唄(범패)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짐작케하는 대목이 있어 
寺刹史와 國樂史에 도움이 된다.
범패는 齋(재)를 지낼때 부르는 노래이다. 재의 종류에는 常住勸供齋<49재, 小祥, 大祥> 十王各拜齋
<십대왕에게 자비를 비는것>, 生前豫修齋, 水陸齋, 
靈山齋<가장 큰 재로 3일간 국가 안녕과 군인들의 武運長久>등이 있다.
 
4.碑文의 部分 詳細
1) 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內供奉賜紫金魚袋 臣 崔致遠 奉敎撰 幷書篆額
   가. 紫金魚袋 :金으로 장식한 물고기 모양의 符契 좌우 두 쪽으로 나뉘어 왼쪽은 궁성에
               비치하고 오른쪽은 몸에 지녀 궁정출입시 맞추어 보던 것-일종의 ID Card
2) 夫道不遠人, 人無異國,是以,東人之子,爲釋爲儒必也.
   西浮大洋,重譯從學,命寄刳木,心懸寶洲. 虛往實歸,先難後獲,亦猶采玉者不憚崑丘之峻,
   深珠者不辭驪壑之深.
   해석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이런 까닭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法이나 儒學을 배우는 것은 필연적이다. 서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 통역을 
   거듭해 가며 학문에 종사할 제, 목숨을 통나무배에 맡기면서도 마음은 西域(寶洲)에 달려 있다.
   빈 체로 왔다가 차게 돌아 왔는데, 험난한 일을 먼저하고 얻는 바를 뒤로 하였으니, 
   역시 玉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높음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바닷물 속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가. 道不遠人,人無異國 :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
        (진리에는 국경이 없다)
   나. 刳木(고목) :속을 파낸 통나무 배, 寶洲 :중국이나 인도를 지칭
   다. 崑丘(곤구) :곤륜산-옥이 많이 생산, 驪壑(여학) :검은 용이 사는 깊은 구렁
3) 而學者或謂, [身毒與闕里之設敎也,分流異體,圜鑿方枘,互相矛盾,守滯一隅] 嘗試論之,說詩者,
   不以文害辭,不以辭害志.
   해석
   그러나, 배우는 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석가(身毒)공자(闕里)가 敎義를 베품에 있어 흐름을 나누고 
   體裁를 달리하여,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이,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만을 지키거나 
   그에 얽매어 있다고 한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辭)을 해쳐서는 안 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 身毒-범어 Shindu-석가의 탄생지,  闕里-공자의 탄생지-산동성 곡부현
   나. 圜鑿方枘(원조방예) :둥근구멍에 네모난 자루를 박는다는 뜻으로,서로 맞지 않음
   다. 嘗試(상시) :시험삼아
   라. 說試者 :시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文)로써 말(辭)를 해쳐서는 안되고 말로써
               뜻(意)을 해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儒와 佛이 비록 진리를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뜻은 서로 통한다는 점을 강조
4) 沈約有云, [孔發其端,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始可與言至道矣.
   해석
   심약의 말에 이르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歸致를 밝혔다.참으로
   그 大要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만하니 비로서 더불어 지극한 道를 말할수 있을 것이다
5) 禪師形貌黯然,衆不名而目爲黑頭陁....元和五年受具於嵩山少林寺嵧璃壇,
   卽聖善前夢,宛若合符.旣瑩戒珠,復歸橫海,聞一知十,茜絳藍靑.....
   해석
   선사는 얼굴빛이 검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라고 했다.....
   원화 5년(헌덕왕2년,810),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聖善)의 지난 꿈이
   완연히 들어맞았다. 이미 계율에 밝았으매 다시 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 들으면 열을 아니,
   絳色이 꼭두서니풀에서 나와 그보다 더 붉고 靑色이 쪽풀에서 나와 그보다 더 푸른 것 같았다.....
   가. 黯然(암연)-검은모양, 聖善-어머니,宛(완)-마치
   나. 숭산 소림사-하남성 등봉현 숭산에 있는 절-達磨 중국선종의 시조(靑眼스님)
   다. 橫海-학문의 길 茜絳藍靑(천강람청)-淮南子 靑出於藍而靑於藍 絳生於茜而絳於茜
6) 大中四年,正月九日詰旦,告門人曰 [萬法皆空,吾將行矣,一心爲本,汝等勉之,
   [無以塔藏形,無以銘紀跡] 言竟坐滅,報年七十七,積夏四十一.
   해석
   大中 4년(문성왕 12년,850), 정월 초아흐렛날 새벽 門人에게 말하기를 '모든 법이 다 空이니 나도 장차
   가게 될 것이다. '한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 形骸를 갈무리하거나 銘을 지어
   걸어온 발자취를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다. 말을 마치고는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나니, 報年이 77세요
   法臘(積夏)이 41년이었다.
   가. 大中四年-문성왕12년,850년,  詰旦(힐단)-새벽
7) 雅善梵唄,金玉其音,側調飛聲,爽快哀婉,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學者滿堂,誨之不倦,
   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競如掩鼻,效玉泉餘響,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
   해석
   평소 범패를 잘하였는데 그 목소리가 금옥 같았다.구슬픈 듯한 곡조에 나를 것 같은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곡진하여, 능히 天上界의 모든 神佛로 하여금 크게 歡喜께 하였다.
   길이 먼 곳까지 흘러 전함에, 배우려는 사람이 僧堂을 가득 메웠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나라에서 魚山(梵唄)의 묘한 곡조를 익히는 자가 코를 막고
   歌曲을 배우 듯 다투어 玉泉(진감선사)의 餘響을 본받으려 하니, 어찌 聲聞(名聲)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가. 側調(=惻 구슬픈 한 곡조),婉(순할 완),誨(가르칠회)
      競如掩鼻(경여엄비) :東晉의 謝安이 콧병이 있어 음성이 탁하였는데 洛下書生詠
      을 잘 불렀다 그 소리를 모방하느라고 코를 막고 소리를 냈다는 고사
8) 憲康大王,恢弘至化,欽仰眞宗,追諡眞鑒禪師,大空靈塔,仍許篆刻,以永終譽.....
   或曰 [禪師垂不銘不塔之戒,而降及西河之徒,不能確奉先志,求之歟,抑與之歟?
   適足爲白珪之玷]
   해석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참된 종교를 흠앙하시어 '진감선사'라고
   추시하시며 탑이름을 '대공영탑'이라 하셨다. 그리고 이에 전각을 허락하여 길이 명예를
   전하도록 하시었다....어떤 이는 말하기를, 선사께서, 탑을 세우지 말고 명을 짓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능히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도다. 그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가 되기에 족하다....
   가. 而降及西河之徒 :후대로 내려와 門徒들에 이르러
   나. 求之歟 抑與之歟 :그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다. 白珪之玷(백규지점) :옥의 티
9) 以隣岳招提有玉泉之號,爲名所累,衆耳致惑,將俾弃同卽異,則宜捨舊從新.
   使視其寺之所枕倚,則以門臨複澗爲對,乃錫題爲雙溪焉.
   해석
   이웃의 큰 산에 절이 있어 '옥천사'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이 듣는데
   혼동을 초래하였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 절 배후의 憑據가 될 만한 것을 둘러보게 하니
   절의 문이 두 갈래 澗水가 마주하는 데 있다고 復命하므로, 이에 '雙溪'라는 題號를 내리셨다.
   가. 招提 :절(사찰)
   나. 將俾弃同卽異(장비기동즉이) :장차 같은(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다. 枕倚(침의) :베개삼고 의지하는
10)遂敢身從兩役,力效五能,雖石或憑焉,可慙可懼,而道强名也,何是何非?
   掘筆藏鋒,則臣豈敢? 重宣前義,謹札 銘云.
   해석
   드디어 몸소(한꺼번에) 두 가지 일에 종사하고, 힘껏 (날다람쥐의) 五能을 본받았다. 비록 
   (말 못하는) 돌이지만 혹여 무슨 말이라도 할는지, 부끄럽고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道'란 억지로 이름 붙인 것이니,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그르겠는가.
   끝이 닳은 몽당붓이라 하며 筆鋒을 드러내지 않는 일을 어찌 臣이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銘을 조목 지어 대강 적는다.
  가. 兩役 :두가지 일,비문을 짓고 글씨까지 썼던 것
  나. 五能 :날다람쥐의 재주,비록 서투를 망정 많은 재주를 펴 보일러 했으나
  다. 雖石或憑(수석혹빙) :(말못하는)돌이지만 혹여 무슨말이라도 할 것인지
  라. 道强名 :억지로 이름하여 道라 한다
  마. 掘筆藏鋒 :몽당붓으로 筆鋒을 드러 내지 않는일
끝으로 최치원이 가야산에서 마지막 생애를 마쳤다고
전설로 남아 있는 곳에서 지은 시 한수를 올립니다
           "題伽倻山讀書堂"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광분첩석후중만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상공시비성도이  고교유수진농산)
가야산 玉流洞濃山亭에서 지었다함
   첩첩바위 사이를 미친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잠시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

鎭權 舜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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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의 사산비명 1편(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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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hee 12.02.11. 09:34
신라시대 孤雲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을 가 장원급제한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유불선의 뿌리가 神敎임을 밝혔고 그가 지은 토황소격문과 계원필경이 유명하다. 훌륭한 고운 주위에 항상 시기가 많았다 한다.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한다. 진순씨 덕분으로 최치원에 대해 조금 공부(?)좀 하였습니다. 碑文의 부분 詳細를 읽고 진순씨 참 대단하신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권진순 12.02.11. 11:38
동희님 무슨 과찬의 말씀을! 중앙박물관 설명자원봉사자님께 저의 짧은 지식으로 같이 공부했던 공부노트에서 다시
발췌하여 올렸습니다.사산비명중 경주의 대숭복사비는 인멸되어 비석 내용만 있지만 봉암사,성주사의 비문은 문경과
보령에 있어서 가서 사진을 찍고 공부도 했습니다.다음에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어려운 글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독일사람 12.02.11. 15:29
진순씨 ,아무리 읽고 싶어도 한문이 너무 많아 세번 읽다가 포기 했어요.이것이 문제 지요.독일 오래 살아 한국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일사람도 아니고 Identity 문제가 또 이런데서 나를 괴롭힙니다.노력은 했어요.자꾸 또 공부 하다 보면 언젠간 똑똑해 지겠죠.한국사람이 한문도 모른다고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여기 다 폭로 하네요.
 
 
권진순 12.02.11. 20:07
독일사람님 너무 한자만 많이 써서 미안합니다.일일이 옥편을 찾을 수도 없고, 읽고 해석하기 힘들고 편안하게 읽을
내용을 너무 대학 강의처럼 강요하였으니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한자사전을 찾는 인내심도 길러서
읽어 바 주시길 바라오며 저는 요즘 한양대 정민 교수가 쓴 책 '삶을 바꾼 만남'을 읽으면서 스승 정약용(丁若鏞)과 제자 황상(黃裳)의 아름다운 사제간의 정을 담은 한시(漢詩)와 대구(對句)를 찾아 큰 옥편을 옆에 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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