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성경

도마복음 10

춘추당 2016. 8. 25. 12:34

도마복음서 10장

10장 Just Enjoy Yourself

그대 자신을 즐겨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말을 탈 수 없으며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쏠 수도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오쇼 해설


 











































































































































































































 





































































































































































































































































































































































 































 

 


모든 사람은 이미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두 개의 활을 당기고 있다, 둘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이 생겨난다, 그대들이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대가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어떻게 그대가 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두 마리 의 말이 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대는 어느 곳으로도 갈 수가 없다.

 

한 마리의 말로는 방향을 잡는 것이 가능하다, 그대는 어느 곳엔가 도착할 수 있다, 두 마리의 말로는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두 마리는 서로를 부정할 것이다, 그대는 어느 곳에도 도착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고뇌이다.

 

그대는 어느 곳으로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대의 고뇌가 바로 이것이다, 삶은 그대의 손에서 빠져 달아나고 있고,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마치 고여 있는 웅덩이의 물과 같이 되어 점점 말라 들어가서 결국에는 죽게 되는 것과도 같다, 거기엔 아무런 목표도 없고 충족감도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그대가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생각이 그대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는 예수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대는 가난한 사람처럼 자유롭고 싶어 한다. 가난한 사람만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는 가진 것이 없다, 지켜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수가 없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빼앗길 것이 없다,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는 편안하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므로 도둑에 대한 걱정도 없다, 그에게는 적이 없다, 그는 경쟁자가 아니다, 그는 아무하고도 경쟁하지 않는다.

 

그대는 가난한 자처럼, 거지와 같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대는 부자가 갖는 안전성을, 황제와 같은 안정을 원하기도 한다, 부자는 안전 하다, 부자는 안정감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부자에게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취약한 면이 없다.

 

부자는 죽음에 대한 방어책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쉽사리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무장되어 있다, 그래서 그대는 거지처럼 자유로우면서도 한편 황제처럼 안정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그대는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어서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누군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대는 그 사람이 물건처럼 행동하기를 바란다, 완전히 그대의 손 안에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대는 물건을 사랑할 수는 없다, 물건은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대에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참으로 인간이라면 그대는 그를 소유할 수 없다, 그는 마치 수은과도 같아서 그대가 그를 손에 쥐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손에서 빠져 달아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유로운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대는 그를 소유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그를 소유한다면 그는 더 이상 한 인간이 아니며 그대는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단지 하나의 물건일 뿐이다, 누가 죽은 물건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다, 그대는 한 인간이 마치 물건처럼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유롭고 생명력 넘치게 살 아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럴 때에만 그대는 그를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대는 어려움을 느낄 것이며 그를 소유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그를 죽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를 독살시키는 것이다, 만일 그가 독을 받아들이면 머지않아 그는 단순한 하나의 물건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들은 집안에서 장식품이 되어버리고 남편들은 단지 그것을 지키는 경비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사랑은 사라진다, 모든 방향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대 내부에는 의심이 있다, 의심은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의심은 그대에게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것은 그대를 더욱 보호해 준다, 아무도 그대를 쉽게 속이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는 의심하지만 의심은 걱정을 낳는다, 내면 깊은 곳에서 그대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의심이란 병과 같은 것이다, 신뢰하지 않으면 그대는 마음 편하게 살 수가 없다, 의심은 흔들리는 것이며 흔들림은 바로 불안이기 때문이다, 의심이란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할까 혹은 저렇게 할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살 것인 가, 죽을 것인가?’ 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그대는 그대의 마음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는 부분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소수도 존재한다.

 

그 소수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그러한 소수 의견에 반대 하여 선택을 했기 때문에 소수 견해는 언제나 그대의 결정은 잘못이라고 항의할 수 있는 상황을 찾을 것이다, 그 소수 견해는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 그대의 마음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대 내부에서 끊임없이 혼란을 일으킨다.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 불안이 따른다, 그것은 일종의 병이다, 그것은 다른 병들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질병이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사람은 점점 더 병이 깊어진다.

그러나 그대는 그를 쉽게 속일 수 없다, 그는 세상을 사는 방법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고 교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병에 걸려 있다, 그러므로 거기 하나의 이익이 있다, 그는 속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에게는 손실도 있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손실이다, 이득을 위해서 아주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늘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이며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비록 그가 결정을 내린다 해도 그 결정은 소수 의견에 반대해서 다수 의견이 내린 결정에 불과 하다, 그는 분열되어 있고 거기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그대들은 또한 신뢰를 원한다, 신뢰하며 살고 싶어 한다. 신뢰는 그대에게 건강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거기에 속임수는 없고 그대는 완전한 확신을 갖는다, 확신은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때 그대는 흔들리지 않고 그대는 전체가 되며 분열되지 않는다, 그리고 전체성은 바로 건강함이다, 이렇게 신뢰는 그대에게 건강을 가져다주지만 이렇게 되면 그대는 취약하게 된다.

 

누구라도 그대를 속일 수가 있게 된다, 신뢰하게 되면 그대는 위험해진다, 그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 가 신뢰하고 있을 때에만 그대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의심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대를 이용하지 못한다.

 

이렇게 그대들은 의심과 신뢰라고 하는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다, 그대들은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끝없는 근심과 걱정 속에서 악화되어 갈 것이다.

 

두 마리의 말에서 겪는 갈등 속에서 그대는 죽어갈 것이다, 언젠가는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그 사고는 그대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대는 어딘가에 도착하기 전에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꽃이 피기도 전에 끝나버릴 것이다, 삶이란 무엇 인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도 전에 그대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대의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말을 탈 수 없으며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모두가 갈등 속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모든 방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말은 두 마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합하면 거기에 수백만 마리의 말이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매순간 그대는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 구조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있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아이들을 기르고 교육하는 방식에 그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모순을 만들어내고 그 모순 덩어리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예를 들면 그대들은 이렇게 배워왔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라, 모든 사람 을 형제처럼 대하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동시에 그대들은 모든 사람들과 경쟁하도록 배우고 길러져왔으며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그대가 경쟁 속에 있을 때 상대방은 적이 된다, 친구가 아니다, 그대는 그들을 쳐부수어야 하며 정복해야만 한다, 실제로 그대는 그들을 파괴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대를 파괴 시킬 것이다, 그대가 만일 경쟁자라면 사회 전체가 적이 되어 버린다.

 

그 누구도 이웃이나 형제가 아니다, 그대는 사랑할 수 없다, 그대는 미워해야 하고 질투해야 하며 화를 내야만 한다, 그대는 끊임없이 싸워서 이길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 그것은 힘든 싸움이다, 그대가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라면 그대는 패배하고 만다.

 

그러므로 강해지고 폭력적이고 공격적이 되어야 한다, 상대편이 공격하기 전에 그대가 먼저 공격해야 한다, 늦기 전에 그대가 먼저 공격해서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패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것을 가지고 경쟁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대 혼자만이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경쟁 속에 있는 마음으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 양쪽 모두를 배워왔다, 그대들은 정직이 최고의 미덕임을 배워왔고 동시에 사업은 사업이다!라고도 배워왔다, 두 가지의 것이 동시에, 두 마리의 말이 동시에 그대에게 주어져왔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러한 모순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 모순을 알기 위해서는 아주 성숙한 지성이 필요하다, 예수나 붓다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가르치는 선생이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은 아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는 그들을 사랑한다, 그러니 어떻게 아이가 그들이 자기에게 모순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의 은인이다, 그들은 그에게 친절하다, 그들은 그를 길러준다, 그들은 그의 에너지와 생명, 그의 모든 것의 원천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러한 모순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버지는 사랑한다, 어머니도 사랑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도 역시 똑같은 교육을 받아왔다는 데에 있다, 그들 역시 부모로부터 배운 것을 반복하는 것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배운 것을 자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병을 옮겨주는 것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 병은 전달된다, 그대들은 그것을 ‘보배’라든가 ‘전통’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병에 불과하다, 그것이 병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건강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의 노이로제 증상은 점점 심화되어 간다, 아이들은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모순적인 방식 속에 자기를 내맡기게 된다, 그러나 그는 너무 늦게 서야 그러한 모순을 깨닫는다, 그대의 모든 삶은 이제 거의 소모되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그대는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이러 한 모순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대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대는 삶 속에서 수많은 모순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 자신이 혼란과 혼잡 그리고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침묵에 대해서 물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오직 모든 모순들이 떨어져나갔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힘든 노력과 아주 예리한 지성, 그리고 성숙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서 그대들은 단지 만트라만 되풀이하고 있으면 침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침묵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면 누구나 다 침묵 상태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단지 ‘람 람 람......’을 되풀이하고 있으면 침묵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말을 동시에 올라타고 있으면서 만트라를 반복하면 침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만트라는 또 한 마리의 말이 될 것이다, 그것이 전부일 뿐이다, 더 많은 혼란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게 될 것이다, 또 한 마리의 말이 더해지면 그대는 그것을 통해 더욱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세속의 사람들보다 더 큰 혼란 에 빠져 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말들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시장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 시장과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토록 혼란에 빠져 있지는 않다, 그는 많은 말들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말들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그 말들이 이 세상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종교인 들 역시 많은 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속하는 말들 외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말들이 더 있다.

 

그들은 더 많은 분열들을 만들어내었다, 또 다른 세계, 신, 하늘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며 그의 존재 내부에서는 더 많은 갈등이 일어난다.

 

그는 분열되어 있다, 그에게 전체성은 없다, 모든 부분들이 흩어져 있다, 그의 전체성은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바로 노이로제 현상이다.

 

그대들이 자라온 방식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이미 성장했고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이해를 통해서 그것을 떨쳐버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더 많은 말을 더 하는 것이 된다, 그대가 만일 이해를 통해서 떨쳐버리려고 한다면 - 그대 스스로가 그 전부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이 떨어져나가는 것이므로 - 새로 더해지는 말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들은 자기들의 목표를 향해 움직일 수 있게 되며 그대는 그대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대만 곤란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말들도 역시 그대 때문에 아주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 역시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과 그대의 말들에 대해서, 양쪽 모두에 대해서 연민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의 가르침이나 예수의 가르침, 또는 붓다의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대 자신의 이해를 통해서이다, 그들은 길을 가리킬 수는 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이해함이 없이 그 길을 따른다면 그대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 이다.

그러니 이제 이것을 이해하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말을 탈 수 없으며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쏠 수도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왜 불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불가능이란 무엇일까? 불가능하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성취할 수 도 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대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성취할 방법이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때에는 진짜 불가능한 일을 의미한다, 매우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그대는 바로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대는 그것을 통하여 헛되이 삶만 낭비할 뿐이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노력해 온 그대에게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그대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그대의 삶만 낭비 할 뿐이다, 이런 결과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지금 그대에게 일어나고 있다.

 

의심하는 사람들을 보라, 의심만 하고 신뢰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만일 오로지 의심밖에 모르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세상을 살아갈 수 없으며 더 이상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정신병원에 한번 가보라, 거기에서 그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만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주 단순한 행동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는다.

 

의심으로 너무나 가득차 있어서 시장조차 가지 못하는 한 남자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시장은 겨우 몇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가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지를 확인하러 몇 번이나 되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가련한 남자를 놀려대곤 했다.

 

그가 문 밖으로 나오면 아이들은 이렇게 놀려댔다. “자물쇠 채운 것을 확인 했나요?“ 그러면 그는 화를 내면서도 다시 자물쇠를 확인하러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는 혼자 사는 사람이었다,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가 강에서 목욕을 할 때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물쇠 채우는 것을 확인했나요?” 그러면 그는 화가 났지만 목욕을 끝내지도 않고 물에서 나와 즉시 집으로 달려가서 자물쇠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완벽한 회의주의자였다, 만일 의심이 지나치게 되면 그 사람은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한다,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린 인간의 한 유형이다.

 

그대가 만일 이와는 반대로 신뢰를 택한다면, 그대는 완전히 장님이 된다, 그러면 누구든지 그대를 어느 곳으로든 데리고 갈 수 있다, 그때 그대는 그 대 자신의 지성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대는 히틀러 주변의 인물들 중에서 이런 타입의 인간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신뢰를 했고 이 신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그대들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다, 절충을 하려면 한쪽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는 노이로제에 걸리게 된다, 다른 쪽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된다, 거기에서는 장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한 논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양쪽을 다 절반씩만 절충하라, 절반의 신뢰와 의심.”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대는 두 마 마리의 말에 올라타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고 또한 신뢰도 하지 않고 살기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대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의심 없이, 그리고 신뢰 없이 살아야 한다.

 

그것은 삶을 단순하게, 매순간을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신뢰라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신뢰하는 것이다, 삶이 그대를 어디로 이끌든지, 아무 의심 없이, 아무런 신뢰도 없이 그대는 그저 순수하게 나아가고 순진무구하게 움직인다.

 

의심하는 사람은 순진무구하게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이기 전에 그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너무 지나치게 생각을 하다가 그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한 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결코 많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다, 그들은 행동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머리로만 사는 인간이 된다.

 

왜냐하면 행동하기 전에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결론에 이르러 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행동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행동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리고는 기다린다, 그러나 삶이란 그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니면 그대는 무조건 믿기만 하는 사람, 장님이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가이든, 미친 사람이든, 교황이든, 성직자이든, 그 어느 누구라도 그대를 어느 곳으로도 데리고 갈 수 있다,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장님이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할 때 거기에 당연히 파멸이 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 인가? 보통의 논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절충하라.”

 

과학자 B.F. 스키너는 기억해 둘 만한 실험을 한 가지 한 적이 있다, 흰쥐 한 마리가 이 실험의 대상이었다, 그는 이 흰 쥐를 이삼 일 동안 굶겨서 몹시 배가 고프게 했다, 실제로 그 흰 쥐는 너무나 배가 고파서 먹을 만한 것 이 있으면 어디라도 뛰어내릴 태세가 되어 있었다.

 

흰 쥐는 받침대 위에 올려 졌고, 그 받침대 바로 밑에는 같은 크기에 같은 색깔 의 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상자 속에는 음식이 들어 있었다, 그 흰 쥐는 왼쪽이나 오른쪽 상자 어느 쪽으로든 뛰어내릴 수 있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그 흰쥐는 즉시 뛰어내렸다, 그러나 오른쪽 상자로 뛰어내리자 쥐는 전기 쇼크를 받았다, 더구나 거기에는 함정이 있었으므로 함정에 빠지게 되면 먹이에 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왼쪽 상자로 뛰어내리자 전기 쇼크도 함정도 없었다, 그래서 쥐는 먹이 에 닿을 수가 있었다, 이삼 일 정도 실험을 계속하자 쥐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쥐는 왼쪽 상자로만 뛰어내리게 되었고 오른쪽 상자는 피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스키너는 상자의 위치를 바꿨다, 쥐는 왼쪽 상자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거기에 전기 쇼크가 있음을 알았다, 이제 쥐에게는 혼란이 왔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좋을지 쥐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뛰어내리기 전에 쥐는 몸을 떨면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철학자의 태도이다, 그는 마치 흰쥐와 같다, 몸을 떨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의심을 한다, 왼쪽 상자일까, 오른쪽 상자일까,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흰쥐는 다시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스키너는 다시 상자의 위치를 바 꿨다, 그러자 그 쥐는 너무나 혼란에 빠져서 심한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이 상자 저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몸을 떨며 망설이게 되었다, 어떻게 결정해야 할 것인가?

 

그러다가 쥐는 그대들이 결정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두 상자 사이로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먹이는 없었고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이 실험을 한 지 몇 주가 지나가 그 흰 쥐는 미쳐버렸고 노이로제에 걸려버렸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대는 혼란 상태에 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그리고 유일하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이것을 선택하는 것도 어렵고 저것을 선택하는 것도 어렵다, 그러니 타협점을 찾아 중간에 뛰어내리면 된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먹이가 없다, 물론 전기 쇼크도 없지만 먹이도 없는 것이다.

 

만일 중간으로 뛰어내린다면 그대는 삶을 놓치게 될 것이다, 만일 흰쥐에게 두 개의 상자 모두를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면 그 쥐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추측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든지, 아니면 중간으로 뛰어내리든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날카로운 지성, 아주 예리하게 깨어 있는 지성이 필요하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 나는 그대들에게 어떤 결론을 줄 생각이 없다, 예수 역시 누구에게도 어떤 결론을 주지 않았다, 단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해답이다, 그대가 이 문제를 이해하면 이 문제는 사라져버린다.

 

믿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타협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 왜냐하면 타협은 독이 되기 때문이다, 신뢰와 의심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의 전체 삶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모순이 있는 곳에는 분열이 있게 마련이다.

 

그대의 정신은 분리가 된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정신분열증이다, 혹은 그대가 만일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부정한다면, 그 다른 하나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 또한 버려지게 된다, 의심은 착취로부터 그대를 보호한다, 믿음은 그대에게 확신을 준다.

 

하나를 버리면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 또한 떨어져나간다, 만일 그대가 양쪽 모두를 선택하면 그대는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는 셈이 된다, 만일 그대가 타협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존재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그대는 둘이 된다, 그것은 더욱 많아져서 군중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단지 그 문제를 이해하고 두 마리의 말에서 내려오라,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완전히 다른 형태의 존재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질이 그대의 의식에 일어난다.

 

그런데 왜 그대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가? 그 질에는 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질에는 완전히 깨어있는 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게 된다, 그대는 단지 충분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기만 하면 된다, 그대의 자각은 착취로부터 그대를 보호할 것이다.

 

충분히 깨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속일 수 없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그대는 무기를 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만일 그대에게 착취를 당하면 그것은 그대가 교활하게 그를 속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비의 마음으로 그대가 하는 짓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을 속이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대를 꿰뚫어 본다, 그의 눈에 그대는 투명하게 비친다, 그는 그대가 투명하게 보일 만큼의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만일 그대가 그를 속일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그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이다, 그대는 그를 속이지 못한다.

 

이러한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대들은 불가능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 이다, 그대들은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결코 가능했던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그것이 쉬워 보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쪽을 택한다, 타협은 언제나 쉬워보인다. 그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대는 타협을 한다, 그러나 타협은 결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협이라는 것은 두 개의 모순되는 것이 그대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개는 항상 긴장 상태에 있으며 그대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결 코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말의 의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를 잘못 이해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완전히 놓치고 있다, 언제나 예수를 머리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

 

그들은 예수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마리의 말만을 선택하라! 이 세상이든지 아니면 저 세상이든지 하나만 선택하라! 두 마리의 말을 타지 말라, 그것은 불가능하며 그대는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말만을 선택하라.” 이것이 바로 그들이 결론짓고 해석해 온 방식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밤 물라 나스루딘의 아내는 배가 고파서 밤참을 먹으려고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었고 있는 것이라고는 개 가 먹는 비스킷뿐이었다, 그래서 시험 삼아서 하나를 먹어보았더니 맛이 괜찮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그 개 비스킷이 너무 괜찮았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그녀는 나스루딘에게 그것을 더 많이 사오라고 부탁 했다.

 

나스루딘은 상점으로 가서 많은 양의 개 비스킷을 샀다, 그러자 상점 점원 이 물었다, “웬일이십니까? 댁의 개는 작은데 이렇게 많이 살 필요가 있나요?”

 

나스루딘이 말했다, “개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아내가 먹으려고 해서 사는 거라네.” 점원이 말했다. “꼭 알려드릴 것이 있는데, 이 비스킷은 개먹이용으로 만든 것이라서 만일 댁의 부인이 잡수시면 죽게 될 것입니다, 독이 들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육 개월 후 나스루딘의 아내는 정말로 죽었다.

 

하루는 나스루딘이 가게에 들러 점원에게 말했다. “내 아내가 죽었다네.” 점원이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비스킷은 댁의 부인을 죽게 할 것이라고요.”

 

나스루딘이 말했다. “그 비스킷이 아내를 죽인게 아니라네, 아내는 자동차에 치여서 죽었다네.”

 

그대들의 마음은 언제나 자신이 내린 결론에 집착한다, 한 가지 결론을 잃으면 자신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 있던지 그대는 자신의 결론을 고집한다, 그것은 그대의 에고와 그대의 정신이 설 수 있는 기반 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물라 나스루딘이 자신이 짚기에는 너무 긴 지팡이를 가지고 걷고 있었다, 한 친구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나스루딘, 지팡이의 밑 부분을 조 금만 잘라내면 좋지 않겠나?”

 

그러자 나스루딘이 말했다. “그렇게 해봐야 소용없어, 너무 긴 것은 밑 부분이 아니니까.” 그대들의 생각은 때로 그대들을 죽게 할 수도 있다, 그대는 그것을 이유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속임수일 뿐이다, 그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설 수 있는 기반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감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머리를 통해서 오는 자신감은 허위이다.

 

머리는 그대에게 자신감을 주지 못한다, 머리는 그대에게 허위적인 것들만 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허위만을 안겨 준다, 그것은 진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머리란 단지 헛된 생각들 이며, 그림자들이다, 그 안에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이유를 만들고 합리화한다, 그러면서 그대는 만족해한다.

 

기독교인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선택하라!” 고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는 절대로 선택하라고 말했을 리가 없다, 예수는 “선택 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선택한다면 마음은 아주 강해져서 파괴되지 않는다, 선택하는 마음은 선택을 통해서 더욱더 단단해진다,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에 의해서 그대는 결코 전체적으로 될 수 없다, 그대는 어떤 것을 부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일 믿음을 선택한다면 그대는 의심을 부정해야만 한다, 그러면 의심은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은 바깥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내부의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단지 눈을 감는 것에 불과하다, 그 뿐이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그대의 무의식 속에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그것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내부에 있다, 마치 벌레처럼 그대의 의식을 갉아먹으면서 그대의 내부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은 표면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것을 떨쳐버릴 수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의심을 선택한다면 그대의 믿음은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은 그대의 한 부분이다, 그대는 타협점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온갖 것이 뒤섞인 합금이 된다, 그것은 하나의 총체가 아니라 타협일 뿐이다.

 

예수가 의미하는 바는 전혀 그 반대이다, 그는 “선택하지 말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말을 탈 수 없으며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쏠 수도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라,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일 하나를 선택하면 그대는 그 하 나를 공경하고 또 다른 하나는 무시하게 된다, 그러면 무시당한 부분은 복수를 하게 된다, 그것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과학은 의심에 의존한다, 전적으로 의심에 의존을 하고 신뢰 같은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과학자들을 알고 있는가? 그들을 관찰해 본 일이 있는가?

 

연구실 밖에서 그들은 믿음이 매우 좋은 사람들이다, 과학자들보다 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속이기가 쉽다, 그들의 의심 하는 부분은 연구실에서 기능을 발휘하고 그들의 신뢰하는 부분은 연구실 밖에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세상 물정에 관한 한 그들은 단순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연구실 속에서 그들은 매우 계산적이고 영리한 사람들이다.

 

그대는 과학자를 쉽게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종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속이기가 쉽지 않다, 사원 안에서 그들은 깊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사원 밖으로 나오면 그들은 아주 영리해진다, 소위 종교인들을 보라, 사원 밖에서 그대는 그들을 속일 수 없다.

 

사원 밖에서는 그들을 속이고 착취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사원 안에서는 그들은 아주 단순하다, 그들은 사원 안에서는 그들이 가진 신뢰의 부분을 사용하고, 세상 속에서는 그들이 가진 의심의 부분을 사용한다, 그들은 유능한 사업가들이다, 그들은 부를 축적하고 세상 전체를 착취하고 있다.

 

과학자는 결코 유능한 사업가가 될 수 없다, 그는 유능한 정치인도 되지 못한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의심하는 부분은 연구실 안에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바깥에서는 신뢰의 부분이 기능을 발휘한다, 집에 있을 때의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을 때와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대들도 그들의 방심 상태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어본 적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자는 그의 주의력을 연구실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연구실 밖으로 나오면 그의 주의력은 사라진다, 그는 그 부분을 사용했고, 그것은 이제 끝나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중적인 삶을 산다, 연구실 안에서 그는 아주 주의 깊은 사람이지만, 연구실을 나오면 방심하는 사람이 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그가 친구의 집을 방문 하고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일에 관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적인 이야기나 잡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는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 했다, 밤은 점점 깊어졌고 11시가 가까워오자 그 친구는 이제 아인슈타인이 그만 돌아가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인물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잠자코 기다리고만 있었다, 때때로 그 친구는 이런 암시적인 말도 해보았다. “이제 밤이 깊었군요.” 또는 “벌써 11시 반이나 되었네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저 친구만 바라보고 하품만 할 따름이었다, 그 역시 졸리운 것이다, 12시가 다 되었을 무렵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하품을 하시 는 것을 보니까 졸린 것 같군요.” 이것은 마지막 암시였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예, 몹시 졸립니다, 나는 당신이 집 에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나도 자러 갈 수 있으니까요.”

 

그 친구는 놀라서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은 지금 나의 집 에 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거 참 실례를 했군요, 나는 줄곧 당신이 돌아가야 내가 잠을 자러 갈 텐데 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연구실 안에서 그는 주의력에 관한 한, 그 안에서 진행되는 상황에 관한 한, 아주 완벽했다, 그러나 주의력은 그곳에서 다 소모되어버린다, 연구실 밖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종교인들의 생활에서 그대가 모순되는 점을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사원 안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라, 그들의 얼굴을 보라, 그 모습은 그렇게 순진해 보일 수가 없다, 눈은 깊은 감정에 젖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대는 그가 밖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어떤 모습으로 그가 자기의 점포에 앉아 있을지, 그대가 그의 점포에 갔을 때 어떤 행동을 그대에게 보여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감정적인 부분은, 그 믿음의 부분은 사원 안에서, 모스크 안에서, 교회 안에서 소진되어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나올 때면 그는 그 부분으로부터 놓여난다, 그러면 그는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깊이 의심하는 회의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타협이다, 예수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대가 만일 하나를 무시 하고 다른 하나를 택한다면, 그대 존재의 그 무시당한 부분은 복수를 할 것 이다.

 

이것이 일을 어렵게 만든다, 그것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대가 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살려고 할수록 또 다른 한 부분은 그 대의 계획이나 생각 전체를 혼란시킨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나타난 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방법이란,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대 존재가 지닌 모순 전체를 이해하는 일이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한쪽에 반대해서 다른 한쪽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물의 한 면만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1루피의 동전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 동전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한쪽 면만을 버릴 수는 없다, 그대는 한쪽 면만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다, 그대는 그 중 한쪽 면을 좋아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두 면 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 면만을 가지고 싶어도 두 면을 다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루피 전체가 그대와 함께 있게 된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대가 싫어하는 면은 숨기고 그대가 좋아하는 면은 표면에 드러내는 것뿐이다, 그것뿐이다, 그것이 바로 의식과 무의식이 만들어지는 방법이다.


의식이란 그대가 좋아하는 부분, 그대가 좋아하는 말이다, 무의식이란 그대가 좋아하지 않는 말, 싫어하는 부분이다, 의식은 그대가 선택한 부분이고 무의식은 그대가 선택하지 않은 부분이다, 이것들은 두 개의 교회, 그대가 다니는 교회와 다니지 않는 교회이다.

 

이와는 다르게 붓다 같은 사람의 내부에서는 의식과 무의식 모두가 사라진다, 그는 좋다고 해서 선택하지도 않고 싫다고 해서 버리지도 않는다, 동전 전체가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오직 동전 전체만이 떨어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반쪽만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의심과 신뢰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추위와 더위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에 속한다,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 속에 속하는 양쪽 극이다, 마치 전기의 양극과 음극, 남자와 여자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현상의 양쪽 극에 불과하다, 그대는 전기의 양극을 버리지 않고 음극만 버릴 수는 없다, 하나만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를 버릴 수는 없다. 그대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대 존재는 분리된다, 버려지고, 억눌려지고, 거부된 부분은 무의식이 된다, 받아들여지고 환영받은 부분은 의식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한다.

 

그대는 여전히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탄 상태에 있다, 전체를 버리는 유일한 방법의 비밀은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버리는 것도 역시 하나의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다, 그대는 버릴 수 있다. - 버리지 않음에 반대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전히 두 마리의 말은 거기에 존재한다, 아니다, 이것은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중요하다.

 

전체적인 인간은 선택함이 없이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동한다. 모든 미치광이 같은 짓들을 이해하라, 그대 자신에 대해서 해온 것들, 그 대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도록 허용해 왔는가를, 그리고 그대가 축적 해 온 여러 가지 종류의 모순들을 이해하라, 그 전체를 꿰뚫어보라.

 

찬성이나 반대도 하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판단도 하지 말라, 단지 그대가 가진 전체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숨기지 말라,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라고 평가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라,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자가 되라, 그대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대 존재의 전체를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그대가 아무리 복잡한 상황에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하나의 이해가 떠오르는 순간, 갑자기 그것은 떨어져나간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벽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다가 “이것은 벽이고 문이 없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과 같다, 그렇다고 이제 그 노력을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

 

그대는 단지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단순하다, 좋고 싫은 것이 없다, - 그대는 단지 이것이 전혀 소용이 없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말의 의미이다, 그대는 단지 지켜본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움직인다, 거기에는 선택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대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해가 있을 때 그것은 무위가 된다, 그리고 무위적인 상태일 때 그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노력이 있을 때 그것은 추함이 된다, 그것은 언제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한다, 노력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대가 무엇인가와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 그대는 싸우고 있는가? 그대가 싸우고 있는 대상이 여전히 그대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적도 역시 의미를 갖는다, 친구와 마찬가지로, 반대이기는 하지만 적도 의미를 갖는다.

그대들은 그대의 적이 죽었을 때 그대의 내부에서 즉시 무언가가 죽는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친구의 죽음만을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적의 죽음도 역시 괴로워한다, 그대는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인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모하메드 알리 진나와 마하트마 간디는 서로 적이 되어 오랫동안 싸웠지만 간디가 죽었을 때 진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몹시 슬프다, 내 안의 누군가가 죽었다.”

 

이제 진나는 누구와 싸우겠는가? 누구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될 것인가? 누구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는가? 적이 없으면 에고는 떨어져나간다, 그대의 존재는 그대의 친구들과 그대의 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대는 모순 그 자체 이다.

 

오직 적도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만이 전체적인 인간이다, 그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저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선택함이 없이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삶이 그에게 무엇을 가져오더라도 그는 그것을 허용한다, 그는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떠다닌다, 그는 투사가 아니다, 그는 자유로움 속에 있다, 그대가 만일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예수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말을 탈 수 없으며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쏠 수도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보통의 의미로는 이 말이 “한 주인만을 택해야 하며, 두 주인을 택해서는 안 된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을 통해서 그대는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 사람의 주인 중 한 주인만을 선택하라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여전히 노예이고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오직 무 선택만이 그대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선택하지 않으며 모든 노력을 버린다, 그대가 이해를 하면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나간다, 그때 그대 는 주인이다.

 

인도에서는 산야신을 스와미라고 불러왔다, 스와미란 ‘자기 자신의 주인’ 이라는 뜻이다, 선택을 버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제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에고이스트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만약 대립되는 두 개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면 그대는 희생자가 된다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립되는 두 개 사이에서 그대가 선택한다면 그대는 그 대립되는 것 사이에서 분열된다는 깊은 이해를 함축한다, 산야신은 이 세계는 부정하고 저 세계는 긍정하거나 하지 않는다, 산야신은 찬성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친구나 적이 없이 단지 움직여간다.

 

선(禪)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의 산야신이 어느 날 아침 언덕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 언덕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는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마침 아침 산책을 하고 있던 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

 

그들은 그 남자를 보고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말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저 중을 알고 있다, 때때로 그의 소가 길을 잃는데 그는 지금 저기에 서서 언덕 주위를 바라보며 소를 찾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가 서있는 모습을 보니 무엇을 찾고 있지는 않다, 그의 눈은 거의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틀림없이 친구와 아침 산책을 나왔다가 친구가 뒤에 처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게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가끔씩 뒤돌아보며 친구가 오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기도를 하고 있거나 명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그들은 호기심이 생겨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인지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언덕에 오르는 일은 힘들었으나 그래도 그들은 올라갔다, 그들이 그 남자가 있는 곳에 이르자 첫 번째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지금 소를 찾고 있는 중이지요? 나는 당신의 소가 가끔 길을 잃기 때문에 당신이 그 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눈을 뜨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소를 찾는 것도, 다른 무엇을 찾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이 맞을 겁니다, 당신은 뒤에 오고 있는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지요?”

 

그 남자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말했다. “나에게는 적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러니 기다릴 친구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혼자이다, 아무도 뒤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혼자다, 완전히 홀로이다.”

 

이번에는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이 완전히 맞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나는 당신이 기도하거나 명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남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야말로 가장 어리석다, 나에게는 기도할 대상이 없다, 그리고 성취해야 할 목표도 없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명상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그들 세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남자가 말했다. “나는 그냥 서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다, 이것이 바로 산야스라는 말의 의미이다, 단지 존재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자유를 얻는다, 친구와 적으로부터의 자유, 소유와 비소유로부터의 자유,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물질과 정신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선택과 분리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때 불가능은 떨어져 나가고 그대는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대는 도(道) 그 자체가 된다, 그대는 흘러 다닌다.

 

불가능한 것을 구하려는 노력이 없어지면 근심은 사라진다, 그러면 그대는 더 이상 걱정 속에서 살지 않는다, 걱정 속에서 살지 않게 되면 환희가 솟아오른다, 환희는 성취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그대는 그러한 능력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 근심 속에서 살지 않을 때 환희는 일어난다.

 

그대는 그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대는 문을 열었고 햇살이 들어와 그대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대는 근심 속에 있고 분리되어 있으며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다.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쏘려고 애쓰고 있다, 그대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다, 그대는 병들어 있다, 그대는 흔들리고 있다, 아니면 기껏해야 그대는 타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노이로제에 걸려버린다.

 

보통의 사람들은 어쨌든 자기 일을 수행한다, 노이로제는 그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순응하는 시민,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비록 그대가 순응하는 시민, 선량한 시민, 그저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환희감도 그대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슬픔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성취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대에게 더 깊은 슬픔을 가져다줄 뿐이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라, 그대보다 앞서 달리고, 그대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한 사람들을 보라, 그대는 그들이 그렇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물라나스루딘이 매우 슬픈 얼굴을 하고 시장을 향해 걸어가 고 있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나스루딘이 말했다. “묻지 말게, 나는 지금 너무 슬프고 우울해서 울고 싶은 심정이네.”

 

그러나 그의 친구는 거듭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을 여태껏 본 일이 없네, 자네는 지금까지 돈 문제라든지 그 밖에 어려운 일들을 너무 많이 겪어오지 않았나? 그래도 자네는 이렇게까지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었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보게.”

 

나스루딘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주일 전에 나의 숙부 중의 한 사람이 죽었다네, 십만 루피의 유산을 나에게 남기고 말이야.”

 

친구가 말했다. “나스루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숙부께서 십만 루피의 유산을 자네에게 남겼다면 기뻐해야지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스루딘이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런데 지난주에 또 한 사람의 숙부가 돌아가셨다네, 나에게 이십만 루피의 유산을 남기고 말이야.”

 

친구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자네는 춤추고 기뻐하며 잔치라도 벌여야할 걸세,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네는 이 마을에서 최고로 행운아일세!”

 

나스루딘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렇지만 이제 나에게는 숙부가 더 이상 없다네, 그것이 나를 슬프게 만드는 거야.”

 

이것이 성공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유산을 물려주는 숙부가 이제 더 이상 없을 때, 갑자기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다, 실패한 사람은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숙부는 아직 남아 있고 가능성은 존재한다.

 

성공할수록 걱정은 많아진다, 성공이 그대에게 노이로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공이 그대에게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미국이 다른 어떤 나라들 보다 정신분열증 환자나 미치광이들이 더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은 많은 분야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토록 심한 광증은 없다, 사람들은 아직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에는 아무 증상도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대는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목표가 성취되었을 때에는 그대는 조용히 서서 그대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그대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만들어온 그 번잡스러운 것들과 혼란을 바라본다, 그때 그대는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질 것이다, 그대는 이전에도 언제나 그런 이상한 상태에 있었겠지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대가 성공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더 이상 꿈꿀 대상이 없을 때 그대는 그대 자신과 마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대의 상태에서는 환희는 불가능하다, 행복은 불가능하다, 그대에게 가능한 것은 그것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에게 만들어온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참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환희는 가능하다, 그것은 예수나 붓다 같은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그것은 그대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자연스러운 것, 가능한 것, 쉬운 것을 생각해야 한다,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것, 도전적인 것을 생각하지 말아라. 에고는 항상 불가능한 것을 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면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에고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그대 자신이 특별한 인물일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서 그대는 위대한 투사가 된다.

 

종교는 쉽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말에 올라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마치 특정한 곳을 목표로 하지 않는 아침 산책과도 같다, 그저 걷기만 하는 것, 그것이 목표이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단지 아침의 미풍과 햇살, 그리고 새들의 소리를 즐기는 것 - 바로 그대 자신을 즐기는 것이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오쇼라즈니쉬의 (도마복음) 11장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tungi@naver.com